박찬일의 안주가 뭐라고 냉제육
집단지성이 만든 메뉴…저동 골뱅이·대원식당 수육
☞한겨레S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세요. 검색창에 ‘에스레터’를 쳐보세요. 식당 단골들의 자부심을 높여주는 건 숨은 메뉴다. 이른바 ‘메뉴판에 없는 메뉴’. 손님 모시고 간 단골들이 외친다. “이모, 그거 되죠?!” 뜨내기는 메뉴판만 보지만 단골은 주방 사정과 별난 룰을 안다. 그게 단골의 징표이기도 하다. 메뉴판에 없는 메뉴, 숨은 메뉴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누구에게나 다 팔 수 있을 만큼 양이 안 될 때다. 마장동 고깃집에서는 왕년에 등골을 그렇게 냈다. 돼지고깃집에서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항정살을 단골에게만 팔았다. 등골이고 토시살이며 항정살 같은 건 흔한 얘기로 ‘한 마리 잡아봐야 겨우 몇그램밖에 안 나오는’ 그런 부위니까. 항정살이 인기를 끄니, 양은 적지 물건은 없지 결국은 수입으로 때우고 있다. 우리나라 수입업자가 외국에 가서 이 부위를 따로 잘라달라고 하니 현지 관계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랬단다. “비계를 왜 따로 사가요?” 항정살은 수입도 비싼 부위가 됐다. 두 번째로는 계절 메뉴다. 철에만 잠깐 나오고 없어지는 것이니 메뉴에 얹을 수도 없다. 대충 매직으로 써서 붙이거나 아예 메뉴판에 없다. 두릅전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다음으로는, 돈 받고 팔기는 그렇고 해서 그냥 단골에게만 주는 메뉴다. 묵은지 조림 같은 거다. 요새야 사다가 쓰는 집이 많지만 예전에는 묵은지를 내는 집이 아주 드물었다. 김치 잘하는 집은 단골에게만 슬쩍 한 접시 주곤 했다.
마지막으로는, 팔자니 귀찮아서(?) 메뉴에 안 넣던 종류다. 세운상가 옆에 있는 ‘대원슈퍼’(요새는 그냥 대원식당이라고 부른다)가 그렇다. 전파사 아저씨들이 들러 이런저런 물건을 사다가 번데기 통조림도 따고 라면도 끓여 먹다가 정식으로 식당이 된 집이다. 당연히 일반식당 허가를 냈다. 전주식으로 ‘가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건 서울식 슈퍼주점이다. 보통 을지로·충무로 골뱅이집의 정식 명칭은 저동 골뱅이였다. 그 집들은 작은 슈퍼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원조들은 생맥주를 안 팔았다. 아니, 못 팔았다. 구멍가게 슈퍼인데 정식 허가도 없었고 생맥주 기계를 들여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골뱅이 캔을 따서 그냥 준다→누군가 거기에 고춧가루라도 뿌려달라고 한다(원래 골뱅이 통조림은 그냥 달달한 양념 국물만 있다)→누가 북어포를 사서 찢어 넣는다→기왕 이렇게 된 거 마늘과 파도 좀 달라고 해서 섞는다. 이런 절차를 거쳐 오늘날의 저동 골뱅이가 탄생했다. 대원식당의 명품 수육도 그렇게 해서 나왔다고 한다. 하나둘 메뉴가 생기다가 수육을 단골에게 삶아줬다. 뭐 어려울 게 없었을 거다. 좋은 고기 사서 갓 삶으면 되니까. 대원식당은 갑오징어·참소라로 유명한데 의외로 삼겹살과 수육이 좋다. 이 집 수육은 주문하면 그때 삶는다. 보통 수육은 40~50분 필요하다. 대원식당 사장님은 현명했다. ‘수육은 바로 삶아야 맛있는데 40~50분을 미리 삶아두면 맛이 없다. 딱 한 접시 분량만큼 잘라 삶으면 빨리 낼 수 있다.’ 이런 의도로 분량을 작게, 가격은 싸게 해서 고깃덩어리를 금세 삶아낸다. 돼지고기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이제는 사라진 을지면옥은 대원식당과 다른 방식을 썼다. 빨리 내는 게 아니라 삶아서 식혀서 낸다. 차가운 제육은 이북식이다. 추운 겨울, 평양을 비롯한 관서지방에서는 돼지를 잡아서 삶아 먹은 뒤 남은 것을 광에 두고 먹었다. 이런 방식이 이북식당인 을지면옥에서 부활한 셈이다. 삼겹살을 적당히 누르면서 식혀 탄력을 주고 씹는 맛을 더한다. 대원식당은 사장님 말을 들으니 내년에 문을 닫는다고 한다. 재개발 때문이다. 을지면옥은 작년에 닫았다. 마지막 영업 날, 따로 알리지도 않았는데 냉면 명가의 최후를 기념하려는 인파가 몰려왔다. 얼마 전에 다시 현장을 찾았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큰 건물을 올리려고 차단막을 쳐놓고 있었다. 현장 옆으로 좁은 골목길이 아직 있는데 그 안쪽으로 소고기구이로 유명한 허름한 ‘통일집’ 간판이 보였다.
을지면옥은 보통 냉면을 먹으러 갔지만 차가운 돼지고기 수육이 일품이었다. 편육이라는 이름으로 팔았다. 달콤하고 매운 양념에 형언하기 힘든 질감을 내는 돼지고기 한 점을 찍으면 소주 안주로 최고였다. 혼자 가서 소주 한 병과 편육 반 접시, 그리고 냉면으로 마무리하는 취미를 가진 단골들이 정말 많았다. 이제는 사라진 풍경이다. 그 시절을 생각하며 냉제육을 만들어 먹는다. 삼겹살 대신 값싼 전지(앞다릿살)를 쓴다. 정육점에서 ‘수육감’이라고 하면 알아서 잘라준다. 꼭 껍데기를 붙여 사야 한다. 이걸 미박전지라고 한다. 박은 껍질을 벗긴다는 한자이고 미박은 껍질을 벗기지 않았다는 의미다. 오겹살이 바로 미박 삼겹살이다. 전지도 삶아서 뜨끈할 때 먹으면 딱딱하지 않은데, 식으면 씹기 불편하다. 그래서 아주 얇게 자르는 게 포인트다. 그게 맛의 비결이다. 음식은 물리적 형태가 맛의 절반쯤 결정한다.
냉제육 조리법 재료: 싱싱하고 질 좋은 미박전지 500g과 소금 1큰술. 양념은 다진 마늘, 다진 양파, 고춧가루 각각 1큰술, 설탕 2큰술, 진간장 3큰술, 새우젓 약간. 1. 작은 냄비에 소금 1큰술과 고기를 통째로 넣고 2리터 정도의 찬물을 붓고 끓인다. 싱싱한 고기이므로 피를 빼고 그럴 것 없다. 파나 양파, 생강, 마늘, 후추알, 월계수, 술, 된장 등은 안 넣어도 된다. 믿으세요. 끓고 5분이 지나면 불을 끈다.(중요하다. 믿으세요) 뚜껑을 덮어 60분 이상 그대로 방치한다. 이러면 고기가 부드럽게 익는다. 믿기지 않으면 탐침 온도계로 고기 속을 찔러 재보면 된다. 80도 이상 나온다. 이게 저온조리다. 수비드라고 하는 저온조리는 ‘진공 포장지에 싸서’ 한다는 의미. 그냥 이렇게 저온에 익히는 방식도 있다. 2. 그동안 양념을 섞어 준비한다. 새우젓이 없으면 액젓이라도 조금 넣는다. 단맛은 설탕으로 조절하는데 원하면 더 넣어도 된다. 냉장고에 넣어둔다. 3. 고기를 꺼내고 흐르는 찬물에서 냉기를 뺀다. 얼음물을 쓰면 더 좋다. 고기를 꺼내 랩으로 싸서 냉장고에 넣는다. 4. 2시간 이상 기다리고 고기를 꺼낸다. 최대한 얇게 저민다. 소스에 찍어 술을 마신다. 후식으로는 냉면!
요리사
익명과 혼술의 조합을 실천하며 음주 생활을 한다. 전국 왕대폿집 할매들 얘기를 듣는 중. 사라지는 것들에 매달린다.
Adblock test (Why?)
맛있는데 단골만 먹기 아까우니까 [ESC] : ESC : 특화섹션 : 뉴스 - 한겨레
Read More
No comments:
Post a Comment